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금수강산 2 3,880 2009.05.2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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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의 대표 작가 앙리 에밀-브누아 마티스(Henri Emile-Benoit Matisse)1869~1954


*야수주의 - 1905년 파리에서 열린 가을 살롱전에 전시된 마티스, 반 동갱 등의 젊은 작가들 작품을 보고 경악한 한 비평가가 이들을 '야수들(Fauves)' 이라고 혹평한데서 탄생했다.
20세기 초 프랑스 작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은 사실주의적인 회화 기법을 버리고 작가의 느낌과 감성을 통해 색을 표현하는 색채변형의 실험주의다. img_7_8011_10?1159192075.jpg img_7_8011_17?1159192075.jpg
<자화상>


마티스는 북부 프랑스에서 곡물상을 하는 유복한 부친과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관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원대로 법률사무소 서기로 일했으나 맹장염으로 인해 잠시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수술 후 회복 기간에 마티스는 그림에 취미를 가진 이웃의 권유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면 '굶어 죽는다'며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는 결국
법률을 포기하고 파리로 가서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는다.
마티스의 그림은 귀스타브 모로의 관심을 받아 그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하였으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티스는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본능적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려 버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했다.
모로는 "너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는 국립 미술 협회가 주관하는 살롱전에 출품하여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그는 어디서나 스스로를 탐구했으며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 받아 자극적인 색을 쓰는데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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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로에게서 영감 받은 <저녁 식탁> -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 중 하나이다.

마티스는 "예술가는 최선의 자아를 오직 그림 속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극일 따름이다. 작가가 분석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마티스는
신인상파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이들의 화풍을 받아들였다.
그들과의 관계는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혁명이었으며 대담한 원색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1900년 전후 마티스의 작품은 신인상주의적 필치와 색채의 대담한 대비 등 일종의 야수파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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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데팡당전에 출품한 <호사, 평온, 관능>

-샤를 보들레르의 시구에서 따왔다.
마티스의 작품을 지탱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주제(고대, 가족, 풍경)를 느린 이동 장면처럼 펼쳐지는 구성 안에서 결합하고 있다.
"이것은 순수한 무지개 빛깔로 그려진 그림이다"
"신인상파의 모든 그림은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약간의 분홍, 약간의 파랑, 약간의 녹색으로 이루어진 너무도 제한된 그들의 팔레트가 내 마음을 썩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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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쓴 여인> <마티스 부인의 초상>


"나는 여자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한 폭을 그릴 뿐이다"
그는 사물을 표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그대로 그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예술적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마티스는 스페인, 모스크바, 모로코 등을 여행하면서 그 곳의 강렬한 태양과 원색의 꽃들, 낯선 이국의 빛깔과 문화에 감동받았다
그는 강렬한 색채의 장식예술 즉 세라믹, 성화, 옷감 등을 발견해 자신의 그림에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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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쇼에 출품한 <푸른색의 누드>.1906 - 당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색체의 해방'을 슬로건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야수파 화가들은 캔버스를 자신들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충분히 활용하였다.
그들은 회화의 질서를 위한 표현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주관적인 면에만 치우치는 것에 문제점을 드러냈고 이들은 불과 2~3년 정도의 수명만 유지했을 뿐, 그 후 야수파 화가들은 입체파 등 다른 운동에 가담하며 활동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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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조화>- 이 그림에서 빨강은 색채가 갖는 무한한 잠재력을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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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마티스 미학의 훌륭한 전범이 되며 많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어떤 이는 이 그림이 마티스 부부의 말다툼을 창문의 중심적인 순수성이 지배하는
비잔틴 시대의 성화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림이라는 종교가 주는 일종의 계시라고 했다. 또는, 고대 함무라비 석비와 연관돼 있지만 주제는 현대 화가의 독백이라고도 해석함 발코니 격자는 'NON(부정어)'으로 읽히는데 이것은 순전히 시각적인 그림의 한계로 말미암아 장면으로부터 단절된 감상자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지적하는 것은 <대화>가 마티스의 작품세계 전반을 대변한다는 사실 이다
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고, 이는 20세기 초의 미술운동인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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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환희>

- 단순화한 형태, 대담한 색의 사용, 종교성을 배제한 신화의 원용 등의 성격 으로 또 다시 물의를 일으켰지만,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야수적인 정신을 요약하고 있으며 그 단조로움과 원시적인 형태는 고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그 주제까지 고갱의 자연인으로의 모습을 닮고있다.

당시 마티스는 프랑스 내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반면, 미국과 러시아 등 외국 소장가들이 그를 지원하게 된다. 특히 러시아 무역상인 마티스의 콜렉터는 그의 아파트를 장식할 대형 장식화를 주문해, 형태를 더욱 단순화하고 단일 색채를 강조한 <춤>과 <음악>을 낳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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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 "나는 남달리 춤을 좋아하고 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본답니다.
표현력이 풍부한 움직임, 율동감 있는 움직임, 내가 좋아하는 음악 따위를요. 춤은 내 안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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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마티스가 지닌 색채의 자유로움은 이미 고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내면 세계를 그리기 위해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했던 고갱과 고흐의 영향으로 야수파는 현실이나 형태로부터 색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마티스의 선은 대상의 모방이 아니라 그의 주관적 움직임의 표현력을 가진 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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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 마티스의 콜렉터인 반스 재단의 빛이 잘 드는 중앙 홀에 설치된 벽화.
마티스는 벽화가 홀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홀에 전시된 그림들에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한 신경을 썼다. 이 벽화 작업에서 마티스는 색종이 오려 붙이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벽화 작업에 앞서 수작업을 손쉽게 하기 위해 바로 그림에 들어가지 않고 먼저 종이를 오려냈다. 오려낸 종이는 캔버스 위에서 자유롭게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벽화를 그리느라 너무 무리한 마티스는 생각처럼 빨리 몸을 추스리지 못했다.
부인과는 법적으로 완전히 갈라섰으며 고통이라는 글자가 마티스의 삶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마티스의 한 시기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이후 비서 겸 모델을 데리고 남프랑스로 가서드로잉과 유화를 그렸다.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그의 친구들과 아들은 프랑스를 떠나라고 성화였지만, '도망자'라는 죄의식에 짓눌리기 싫어 사방에 깃들인 불안 속에서도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마티스가 부지런히 작업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암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마티스는 "예술가는 최선의 자아를 오직 그림 속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극일 따름이다. 작가가 분석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말년에 관절염으로 인해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마티스는 과슈를 칠한 종이를 "가위로 데생을 하듯이" 잘라내어 콜라쥬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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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스 성당>에 장식된 마티스 작품들


전쟁이 끝난 후 파리에서 열린 마티스 전시회는 큰 호평을 받았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런던의 미술관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러던 1947년 말 드디어 마티스는 자신의 '이제까지의 탐구'를 총결산하게 될 '건축학적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방스에 성당을 지으려는 계획에 협조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마티스는 자신의 오려붙이기 작업을 스테인드글라스 창에 적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열정을 성당 작업에 쏟아 부으며 한때는 수도자가 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종교는 곧 그림이었던 것이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자가 자기의 삶을 작품에 불어넣는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그 때 예술품은 마치 자연물처럼 풍요하고 보는 이를 전율로 몰아넣는 힘-그 눈 부신 아름다움-을 가진 것으로 우리 눈 앞에 나타난다." 죽는 순간까지도 작업에 몰입했던 마티스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진리를 향한 그 끈질긴 탐구, 그 타오르는 열기, 모든 작품의 탄생에 필수적인 그 분석의 깊이를 고취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그런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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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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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심지수 2009.07.09 08:14
선배님, 감사합니다. 작가와 작품, 시대배경..삶..역시 '예술은 매력적입니다' 작가의 창의력이 들어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남는... 선배님은 그림에 아주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전 어떤 기억을 색감으로 하는 편이랍니다. 유화를 특히 좋아합니다. 깊이가 있어서.. 최근에 제가 어느 한 학생을 후원하게 되었는데 그 엄마가
본인의 그림을 보내주셨어요. 매일 즐기도 있습니다. 그 그림안에 추억을 넣고 있어요   
금수강산 2009.08.01 09:02
심지수 후배님  이제사 후배님의 댓글을 보았어요 
좋은 감상을 하셨다니 감사합니다~
한때 미대 지망생였던 그꿈을  가슴속에 감추어 두고 화가들의 미술작품을 기웃거리며 그냥 감상하는 수준이랍니다
멋장이 후배님  우리 함께 즐감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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