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시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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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권신아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해설> - 정끝별·시인 

   시냇물 같은 목소리로 낭송했던 가수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를 옮겨 적던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류' 시인이 되었다.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쓴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강에 뛰어들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마와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페시미즘의 미래'라는 시어가 대변하듯 6·25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수려한 외모로 명동 백작, 댄디 보이라 불렸던 박인환(1926~1956) 시인은 모더니즘과 조니 워커와 럭키 스트라이크를 

좋아했다. 그는 이 시를 발표하고 5개월 후 세상을 떴다.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연일 계속했던 과음이 원인이었다. 이 시도 어쩐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일필휘지로 쓴 듯하다. 

목마를 타던 어린 소녀가 숙녀가 되고, 목마는 숙녀를 버리고 방울 소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소녀는 그 방울 소리를 추억하는 늙은 여류 작가가 되고…. 냉혹하게 '가고 오는' 세월이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로 

요약되는 서사다.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생명수를 달라며 요절했던 박인환의 생애와, 시냇물처럼 흘러가버린 박인희의 목소리와, 

이미 죽은 그를 향해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의 애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인 것을, 우리의 시가 조금은 감상적이고 통속적인들 어떠랴. 

목마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모라면,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출처> 2008.01.19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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